그림움, 향수 그리고 동경

[그리움, 향수 그리고 동경]


1. 그리운 어린 시절

여우난곬족ㆍ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별 헤는 밤ㆍ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경,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은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성탄제ㆍ김종길

새하얀 건물에
새하얀 백열등이 밝히고

 
아직은 어렸던 엄마가
힘겹게 배에 자리잡은 어린 목숨을 쓸어보았다.

 
이윽고 문 밖에서
여의사가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 의사가 무심하게 보여준 
그 흑백사진 속 살아있는 아이...

 아이와 엄마는 똑같이 어려서
엄마는 서느런 사진 속 아이를
따스하게 받지않고 말없이 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따금 건물의 백열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엄마도
그 때의 여느 엄마만큼 나이를 먹었다.

 
예전과 거의 변함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그때와 같지만 다를 것이 내리는데

 
외로운 서른 살, 그녀의 손에
불현듯 그 사진의 딱딱한 한기를 느끼는 것은

 힘겹게 자리잡았던 흑백사진 속 처음 본 아이를
그때에 차마 만져보지도 못했던 까닭일까.

2. 숭고한 사랑의 모습


자모사ㆍ정인보



1 가을은 그 가을이 바람불고 잎 드는데 

  가신 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 

  살뜰히 기르신 아이 옷 품 준 줄 아소서 

 

2 부른 배 골리보고 나은 얼굴 병만 여겨 

  하루도 열두 시로 곧 어떨까 하시더니 

  밤송인 쭉으렁인 채 그지 달려 삽내다 

 

3 동창에 해는 뜨나 님 계실 때 아니로다 

  이 설움 오늘날을 알았드면 저즘미리 

  먹은 맘 다 된다기로 앞 떠날 줄 있으리 

 

4 차마 님의 낯을 흙으로 가리단 말 

  우굿이 어겼으니 무정할 손 추초(秋草)로다 

  밤 이여 꿈에 뵈오니 편안이나 하신가 

 

5 반갑던 님의 글월 설움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니 말랐도다 

  받들어 낯에 대이니 배이는 듯하여라 

 

6 므가나 나를 고히 보심 생각하면 되 서워라 

  내 양자(樣子) 그대로를 님이 아니 못보심가 

  내 없어 네 미워진 줄 어이 네가 알것가 

 

7 눈 한번 감으시니 내 일생이 다 덮여라 

  질 보아 가련하니 님의 속이 어떠시리 

  자던 닭 나래쳐 울면 이때리니 하여라 

 

8 체수는 적으셔도 목소리는 크시더니 

  이 없어 옴으신 입 주름마다 귀엽더니 

  굽으신 마른 허리에 부지런히 뵈더니 

 

9 생각도 어지럴사 뒤먼저도 바없고야 

  쓰다간 눈물이요 쓰고 나니 한숨이라 

  행여나 님 들으실까 나가 외워 봅니다 

 

10 미닫이 닫히었나 열고 내다보시는가 

  중문 턱 바삐 넘어 앞 안 보고 걸었더니 

  다친 팔 도진다마는 님은 어대 가신고 

 

11 젖 잃은 어린 손녀 손에 끼고 등에 길러 

  색시꼴 백여가니 눈에 오즉 밟히실가 

  봉사도 님 따라간지 아니 든다 웁내다 

 

12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어라 

 

13 썩이신 님의 속을 깊이 알 이 뉘 있스리 

  다만지 하루라도 웃음 한번 도읍과저 

  이저리 쓰옵던 애가 한 꿈되고 말아라 

 

14 그리워 하 그리워 님의 신색 하 그리워 

  닮을 이 뉘 없으니 어딜 향해 찾으오리 

  남으니 두어 줄 눈물 어려 캄캄하고녀 

 

15 불현듯 나는 생각 내가 어이 이러한고 

  말 갈 데 소 갈 데로 잊은 듯이 열흘 달포 

  설움도 팔자 없으니 더욱 느껴 합내다 

 

16 안방에 불 비치면 하마 님이 계시온 듯 

  닫힌 창 바삐 열고 몇 번이나 울었던고 

  산 속에 추위 이르니 님을 어이 하올고 

 

17 밤중만 어매 그늘 세 번이나 나린다네 

  게서 자라날 제 어인 줄을 몰랐고여 

  님의 공 깨닫고 보니 님은 벌써 머셔라 

 

18 태양이 더웁다 해도 님께 대면 미지근타 

  구십춘광(九十春光)이 한 웃음에 퍼지서라 

  멀찌기 아득케나마 바랄 날이 언제뇨 

 

19 어머니 부르올 제 일만 있어 부르리까 

  젖먹이 우리 애기 왜 또 찾나 하시더니 

  황천(黃泉)이 아득하건만 혼자 불러 봅내다 

 

20 연긴가 구름인가 옛일 벌써 희미(熹微)해라 

  눈감아 뵈오려니 떠오느니 딴 낯이라 

  남없는 거룩한 복이 언제런지 몰라라 


 

21 등불은 어이 밝아 바람조차 부는고야 

  옷자락 날개 삼아 훨훨 중천 나르과저 

  이윽고 비소리나니 잠 못 이뤄 하노라 

 

22 풍상(風霜)도 나름이라 설움이면 다 설움가 

  오십년 님의 살림 눈물인들 남을 것가 

  이저다 꿈이라시고 내 키만을 보서라 

 

23 북단재 뾰죽집이 전에 우리 외가(外家)라고 

  자라신 경눗골에 밤동산은 어디런가 

  님 눈에 비취던 무산 그저 열둘이려니 

 

24 목천(木川)집 안방인데 누우신 양 병중이라 

  손으로 머리 짚자 님을 따라 서울길로 

  나다려 말씀하실 젠 진천인 듯하여라 

 

25 뵈온 배 꿈이온가 꿈이 아니 생시런가 

  이 날이 한 꿈되어 소스라쳐 깨우과저 

  긴 세월 가진 설움 맘껏 하소 하리라 

 

26 시식(時食)도 좋건마는 님께 드려 보올 것가 

  악마듸 풋저림을 이 없을 때 잡숫더니 

  가지록 뼈아풉내다 한(恨)이라만 하리까 

 

27 가까이 곁에 가면 말로 못할 무슨 냄새 

  마시어 배부른 듯 몸에 품겨 봄이온 듯 

  코끝에 하마 남은가 때때 맡아 봅내다 

 

28 님 분명 계실 것이 여기 내가 있도소니 

  내 분명 같을 것이 님 가신지 네 해로다 

  두 분명 다 허사외라 뵈와 분명하온가 

 

29 친구들 나를 일러 집안 일에 범연타고 

  아내는 서워라고 어린아이 맛없다고 

  여린 맘 설움에 찢겨 어대 간지 몰라라 

 

30 집터야 물을 것가 어느 무엇 꿈아니리 

  한 깊은 저 남산이 님 보시던 옛 낯이라 

  게섰자 눈물이리만 외오 보니 설워라 

 

31 비 잠깐 산 씻더니 서릿김에 내 맑아라 

  열구름 뜨자마자 그조차도 불어 없다 

  맘 선뜻 반가워지니 님 뵈온 듯하여라 

 

32 마흔의 외둥이를 응아하자 맏동서께 

  남없는 자애렸만 정 갈릴가 참으셨네 

  이 어찌 범절만이료 지덕(至德)인 줄 압내다 

 

33 찬 서리 어린 칼을 의로 죽자 내 잡으면 

  분명코 우리 님이 나를 아니 붙드시리 

  가서도 계신 듯하니 한 걸음을 긔리까 

 

34 어느 해 헛소문에 놀라시고 급한 편지 

  네 걸음 헛디디면 모자 다시 안 본다고 

  지질한 그날 그날을 뜻 받았다 하리오 

 

35 백봉황(白鳳凰) 깃을 부쳐 도솔천궁(兜率天宮) 향하실 제 

  아득한 구름 한점 옛 강산이 저기로다 

  빗방울 오동에 드니 눈물 아니 지신가 

 

36 엽둔재 높은 고개 눈바람도 경이랏다 

  가마 뒤 잦은 걸음 얘기 어이 그쳤으리 

  주막집 어둔 등잔이 맛본상을 비춰라 

 

37 이 강이 어느 강가 압록(鴨綠)이라 엿자오니 

  고국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 

  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38 개울가 버들개지 바람 따라 휘날린다 

  행여나 저러할라 돌이고도 굴지 마라 

  이 말씀 지켰다한들 누를 향해 사뢸고 

 

39 이만 사실 님을 뜻조차도 못받든가 

  한번 상해드려 못내 산 채 억만년을 

  이제와 뉘우치란들 님이 다시 오시랴 

 

40 설워라 설워라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무덤풀 욱은 오늘 이 살붙어 있단 말가 

  빈 말로 설운 양함을 뉘나 믿지 마옵소

| 어머니ㆍ정한모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가정ㆍ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 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거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어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3. 근원으로 돌아가고픈 향수


향수ㆍ정지용

넓은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고향ㆍ백석

1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2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디냐 한다 

3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4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고향 앞에서ㆍ오장환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잰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4. 이상향에 대한 동경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ㆍ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즈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따지 않으시렵니까?

| 청노루ㆍ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ㆍ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5. 자유를 향한 동경


푸른 하늘을ㆍ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종소리ㆍ박남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 보리피리ㆍ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ᄅ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ᄅ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ᄅ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何) 

눈물의 언덕을 

피―ᄅ 닐니리


6. 가슴 설레는 기다림


행복ㆍ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내 마음은ㆍ김동명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 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ㆍ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by 아타리마에 | 2008/09/15 15:03 | Review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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